THE WORLD WITHOUT MOM
KAL YU-RA (annie120901@naver.com) Media,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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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how 2020.03.14-03.29 (Jungganjijeom),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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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2-22.01.28 Incheon Art Platform, Incheon, Korea
18.01.08-18.03.09 Baltic Centre for Contemporary Art, Newcastle upon Tyne,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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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JACOB'S LADDER Solo Exhibition Review', Public Art 2018.09 Vol.144
2016 'Capitalism-Neo liberalism and Dilemma of Art', Monthly Art 2016.04 vol.375
2014 'In my bag'project, Rubybox Publisher Co
2012 Contemporary Art Journal Vol.9
Back to Back : What if?
<제1회 꼬리에 꼬리를 물고: What if?>는 중간지점이 지목한 한 작가가 다음 한 명의 작가를 추천하고, 그 한 명의 작가가 또 다른 한 작가를 지목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프로젝트이다. SNS 상에서 릴레이로 진행되는 챌린지에서 섭외 형식을 착안하였다.
중간지점은 2019년 어느 날 임정수 작가에게 참여 제안과 다음 작가 지목을 요청했다. 3일 뒤 임정수 작가는 전시 참여 수락과 동시에 갈유라 작가를 추천했다. 갈유라 작가는 하루가 지나서 전시 참여 의사를 밝혔으며 정상인 음악가를 추천해 주었다. 정상인 음악가는 일주일 후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이어 다음 참여자 섭외를 두 차례 시도했지만 약 두 달 동안 진행된 섭외는 끝이 났다.
SNS에서 진행되는 많은 챌린지에서 자신이 지목을 받게 된다면, 하나의 글을 올리기 위해 어떤 이미지를 사용할지부터 다음 누구를 지목할지, 글을 썼다 지웠다 하며 고민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개개인의 내용 하나하나보다는 챌린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지속되는 상황 자체가 더 드러나게 된다.
섭외의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여오고 있는 세 작가의 각자의 타임라인은 전시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꼬리를 잡은 작가들은 본격적으로 중간지점에서 서로 꼬리를 물어야 하는데, 얼마큼 많이, 얼마큼 강하게 물 것인지 더 나아가 어느 정도 꼬리를 내어줄 것인지는 개인의 짐작과 선택에 달려있다. 제약이 최대한 배제된 프로젝트일지라도 결국에는 계속 자기만의 기준을 세워가면서 제각기 순응하는 형태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렇게 다른 시간을 지내오다 동시에 머무르게 되는 중간지점은 저마다의 시간이 무작위로 뒤섞여 보이는 SNS 피드와 다를 바 없는 공간이 된다. 중간지점에서 세 작가의 상호작용으로 흘러가는 '순간의 시간'이 도드라진다.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때, 물린 꼬리는 여전히 나만의 것일까? 내가 물고 있는 꼬리의 일부는 지금 나의 것이라 할 수도 있을까? 혹은 우리의 것일까? 중간지점이라는 공간 안에서 세 작가가 꼬리로 벌이는 돌고 도는 줄다리기와 같은 광경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출처: 중간지점 제공 자료)
중간지점에서의 스크린들은 1.보기를 위해 놓여져 있지 않는다. 2.놓여져 있기를 거부한다. 3.보기를 위한 방식이 되기를 선호 하지 않는다. 스크린 속 이미지는 장소도 시간도 명시되어 있지 않는다.
서로의 저울을 오르내리며 그 어느 부분이 현재.라고 ‘잠시’ 말할 수 있는 상태 인 것처럼 이것은 중간지점이라는 공간 안에서 임정수작가의 작업과 정상인작가의 작업과 (공통의 시간 속에서) 관계를 이루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듯 동시에 침범되는 방식이 되기를 바란다.
세 명의 작가 중 누구나 이 위치와 보기의 방향성을 <-•-> 선점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모두의 첫 대화는 스크린 너머 각기 다른 장소에서 시작되었고 동일하지않은 패널과 명암비의 스크린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을 향해 있었던것처럼.
(작가노트)
Back to Back : What if? 'REVIEW'
반 정도 잊어버린 꿈 속에서 계속 돌아가는 회전문처럼
콘노 유키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연상이 펼쳐질까.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첫 번째 꼬리를 가진 주체 혹은 대상은 다른 주체/대상을 물게 즉 관계를 맺게 된다. 하나가 곧 하나의 꼬리를 무는 (동어)반복과 달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우 둘 이상의 대상/주체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주장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바로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우리는 단순한 반복과 예측할 수 없는 비약의 가능성을 둘 다 포함한다. 같은 일의 반복일 수도 있고, 반복이 곧 다른 효과를 창출하는 기점이 되면서 (반복이라는) 상태의 묘사와 사건의 발생을 모두 내포한 힘을 꼬리에 꼬리 물기가 보유하고 있다. 적절한 예시로 교통 사고가 있다. 작은 규모로 발생한 추돌 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더 무는 경우, 화재와 같은 다른 사고를 부르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자동차에 어떤 자동차가 부딪힌 결과 자체는 반복적이다. 그런데 거기서 퍼져 나가는 영향은 두 대상/주체를 (두 운전자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인과관계로 단단히 묶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기란 반복된 결과와 어떤 사건과 사태를 유발하고 둘 이상의 대상/주체를 인과관계로 묶는다. 이 두 가지 속성을 우리는 각각 ‘연속(하는 결과)’과 ‘연쇄(에 의한 효과 발생)’로 보자. 두 속성은 각기 다른 효력을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두 대상/주체 이상의 ‘만남’에 있다. 만남은 우연히 생기거나 필연적으로 생길 수 있지만, 이를 판단하는 근거는 창출의 기점, 바로 효과 발생에 의해 제시된다. 교통사고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다리가 봉쇄되고 사람들이 대피한 다음에 마을에 불씨가 옮겨 붙으면, 추돌 사고가 전체 연결고리의 기점 즉 원인이 된다. 이때 연속의 속성은 이미 연쇄로, 말하자면 서로 다른 개별 요소들이 원인과 결과로 묶이는 관계로 전개된다. 이처럼 상태 묘사와 돌발 상황을 창출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기는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반복도 아니고 의도된 책략도 아니다. 오히려 우연히 벌어진 일에서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각각에 분배할 수 없는) 잠재력의 온/오프 상태이다. 이 상태는 도로를 통제해봤자 의미가 없는, 그 정도로 예기치 못하고 순식간에 닥치는 힘이다.
이런 통제는 기획전에서 작품의 위치, 바로 공간적인 위치와 독해의 위치를 각각 전시 공간과 주제에 종속시킬 때 작동한다.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는 이렇고, 어디에 어떤 작품이 들어가고, 어떤 장비가 필요하고 어떤 안내문과 설명을 붙이고 등등. 이런 준비 과정이 대변해주듯이 미술 전시는 통제가 작동하며 어떤 변수가 발생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설령 제작의 스케치 업부터 실제 공간에 ‘계획’이 관여한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잠재력은 완벽하게 조정되고 통제되지 못한다. 지정된 작품의 위치와 전시 주제는 대부분의 경우 작품을 통제하고 우발적인 상황을 억제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상을 통해서 작품에 내재된 잠재력을 끄집어낼 수 있다. 잠재력을 끌어내는 행위는 외부 요인을 전시 주제나 전시장에 가져오는 것과 별개로 이루어진다. 관객―불청객일지도 모르는―의 소란이나 전시 기간의 조기 종료, 그리고 그외 (외부) 가능성들은 잠재력을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때 잠재력이 외부에서 주어진다면 작품과 작품이, 작품과 관람자가 맺는 연속과 연쇄의 관계 설정 자체가 무효해진다. 전시를 컨트롤하는 주체의 상상과 대비를 초월할 정도로 어떤 일이 급습하는 것과 달리 보는 행위, 즉 감상을 경유해서 우리는 작품에 잠재하는 힘을 끄집어낼 수 있다.
이번에 중간지점에서 열린 «제1회 꼬리에 꼬리를 물고: what if?»는 작가 세 명이 참여한 단체전이다. 말 그대로 꼬리를 꼬리를 무는 방식, 더 익숙한 사례를 들면 (서문에 나오듯) SNS 상의 릴레이 챌린지처럼 기획된 이번 전시는, 준비 기간 중에 세 명이 각각 어쩔 수 없이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필자 역시 직접 전시를 관람하지 못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번 전시 제목은 이런 외부적 요인 때문에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서로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간 운영자와 작가는 미팅을 했고, 작가 중의 한 명은 설치를 직접 못했다. 뿐만 아니라 리뷰를 쓰는 사람이 전시를 직접 보러 가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번 전시 제목을 거대한 외부 요인에 바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은 주제에서 뻗어나가는 국가 사회적 분위기로 확장되기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서 봤듯이 작품과 관람객이 만나 그들이 끄집어내는 잠재력의 차원, 말하자면 더 작은 규모에서 우연히 발생하고 창출되는 힘이다. 세 작가는 한 공간 안에 설치와 영상, 그리고 사운드를 어우러지게 보여준다. 임정수 작가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작품 <피부 여러개>(2019)와 관련되는 동명의 설치 작품을 선보이고, 갈유라 작가는 영상 설치 작품 <사용자 모니터 환경에 따라 색상이 달라 보일 수 있습니다>(2020)을, 정상인 작가는 사운드 작업 <1382400>(2020)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의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복은 작가의 섭외 방식뿐만 아니라 전시 공간에서 전개되는 작품의 색감에 나타난다. 의도했건 안 했건 색상이 맞는 작품끼리 어울린 결과만 보면, 꼬리에 꼬리를―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지만―“잘 물었다”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전시 공간에서 참여 작가 세 명이 다 같이 준비를 함께 못 했는데도, 나아가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지목하는데도 결과적으로 세 작가의 작품은 공간 안에서 잘 맞아떨어졌다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꼬리에 꼬리를 물기는 단순히 전시의 기획성으로 포섭되고 말 것인가? 공간 내부에 실현된 결과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과 달리, 리뷰에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작품이’ 어떤 힘을 펼치는지이다. SNS 상의 챌린지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고 반복에 그칠 수도 있지만, 그 ‘전개’에 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선보이는 작품은 가만히 놓이기만 하지 않는다. 준비 기간에 몇명 작가가 부재하고 코로나바이러스가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전시가 다행히 이루었다는 궁극적인 결과에 머물지 않는다. 기획 의도와 외부 요인은 전시를 전부 다 포섭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번 전시가 감상자의 관람 행위를 통해서 꼬리를 무는 결과도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작품은 외부에서 주어진 제약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전시장을 나오면 정상인 작가의 사운드를 들을 수 없고, 임정수 작가의 설치 작품을 비메오를 통해 영상에 나오는 무대장치 혹은 퍼포머의 도구로 보게 되고, 갈유라 작가의 작품을 사진과 같은 정지된 기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반대로, 그러니까 전시장에서 하는 경험에 이미 작품에 다가가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전시를 여는 기간/시간은 물론, 오늘날 관람자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제약이 작품 감상에 영향을 미친다. 정상인 작가의 작품의 경우 전체 연주 기간 동안 전시장에 머무는 관객은 없었을 것이고, 갈유라 작가의 모니터에서 나뭇잎, 그림자, 바다, 하늘의 이미지가 움직이지 않(다고 판단하)자 관객은 금방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임정수 작가의 작품 역시 펼쳐진 공간에 퍼포먼스로 개입을 하는 작가가 전시 공간에 없었다면 설치 작품은 퍼포먼스의 도구나 무대로, 영상 작품은 퍼포먼스의 기록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작품은 길이 때문에, 어떤 작품은 멈춘 화면 '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작품은 작품에서 파생되거나 종속되는 대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우리는 전시 공간에서도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지 못한다. 전시 주제가, 전시장의 배치가, 그리고 전시와 관련 없는 외부적 요인이 미치는 것과 다른 지점에서, 이들은 제약이 들어간 감상을 상정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이 궁극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효과, 말하자면 연속과 연쇄를 통해 전개하는 힘인 잠재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작품은 이런 제약 때문에 자체적인 잠재력을 끄집어낼 수 있다. 세 작가의 작품은 잠재력을 실현하는 중인 상태로 전시장에 배치된다. 바로 이미 전시 자체가 우발적인 결과물이고 관람객은 우발의 장면으로 잠재력의 ‘흔적’을 보게 된다. 정상인 작가의 경우,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계속 틀어지는 사운드는 관람객이 입장할 때 부분으로만 경험하는 대상이다. 한편 갈유라 작가의 경우는 모니터와 사운드의 경험을 상영시간이나 러닝타임과 다른, 마치 인스타그램을 켜자마자 우연히 보는 첫 포스팅처럼 전달한다. 그리고 임정수 작가의 작품은 퍼포먼스에 들어갈 어떤 요소로, 그리고 퍼포먼스의 어떤 흔적으로 전시되면서, 퍼포먼스를 보는 경험을 파편화한다. 각각이 전체 중의 부분들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작품 자체로 잠재력이 뿜어져 나오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그러기에 관람객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복의 상태가 아니라 이미 발생되는 효과를 목격한다는 의미에서 관람자가 된다. 이번 전시에서 잠재력이란 보기의 방식을 통해서 끄집는 것이 아니라, 전시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이미 발현 중인 결과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의 <가구의 음악>(1920)처럼 감상하는 자세에 걸리지 않는, 작품의 파편적인 존재 방식과도 같다. 사티가―결국 실패했지만―의도한 이 작품은 쉬는 시간에 연주되는 음악이었고 사람들의 몰입을 거부하는 음악으로 작곡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진으로 기록하고 비메오로 작품을 대신 보는 환경에서, 다시 몰입시키려는 태도와 달리, 작품의 잠재력은 작품 자체로 파편화하면서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임정수 작가의 <피부 여러개>라는 제목은 퍼포먼스의 존재 방식뿐만 아니라 감상 방식, 그리고 세 작가가 전시 공간에서 제시한 작품의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 우리는 작품 자체를 이제 본다기보다는 작품의 어떤 부분을 통해서 작품을 본다. 본체가 아닌 여러 개의 피부를 우연히 접하고 떠나는 감상 방식은 어떤 힘이 발현되는 결과, 말하자면 흔적으로 존재한다. 흔적이란 어떤 존재나 사건을 지표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번 전시의 경우 작품의 일부분으로 작품이 스스로 토막 낸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품은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과 달리, 연속과 연쇄의 결과는 작품으로 하여금 본체와 이어지면서 힘을 발휘한다. 감상을 다 못하는 전체 사운드 트랙과 영상에 파악할 수 없는 러닝타임과 스틸 이미지에 가까운 시각적 결과물, 그리고 작가가 오지 못하는 환경에서 선보여진 퍼포먼스는 여러 개의 피부로 쪼개져 전시장에 있다. 작품이 자체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때, 반 정도 잊어버린 꿈 속에서 회전문이 계속 돌아가는 것처럼 쪼개진 작품은 잠재력의 발현을 그들 스스로 조건 짓는다. 관람자의 (몰입이 아닌) 파편화된 감상방식에, 작품은 다가갈 수 없는 여지를 스스로 만들어 반복과 연쇄를 자체적으로 작동시킨다.
Finally, It Comes to the Front

이내 눈앞까지 가득차고(Finally, It comes to the Front)_mix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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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의 마지막에 빛이 보인다면, 끝까지 헤엄쳐갈 수 있겠습니까? 『 불량선인~갈유라 』 : 스크린을 닫은 채, 깊은 어둠 속으로 균형을 잃고 유영하기.
갈유라와 불량선인은 협업을 위해 주어진 기간 동안 , 보기와 이에 따른 존재자 간의 권력-위계 생성과 변동, 수직적 감시의 시각과 편재적 현전에 따른 시공간의 축소, 주의(attention)의 정치 등 ,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그에 대한 제안으로,
1.시각과 균형감각을 잃게 하는 검은 통로를 지나야 한다.
2.불규칙한 사운드 빛으로 지배된 공간을 지나,
3.보기의 감각이 제거된 닫혀 있는 스크린 을 지나,
4.가까스로 스크린 외부를 감각 할 수 있는 장소에 도달하게 된다면,
몸을 기대고 텍스트와 함께 유영하기(=쉬어가기)의 상황에 놓인다. 텍스트를 읽은 뒤, 이 통로를 다시 빠져나올 때의 감각은 새로운 것이 되고 등 뒤로 들려오는 사운드는 다른 감각이 되어 다시 이 검은 항로를 빠져나오게 되기를 권한다.
AMADO ANNUALNALE (불량선인~갈유라)
이 지하는 바다다. 어둡고 서늘하며 온통 눈앞이 캄캄해지는 바다. 바다는 마치 출애굽기의 홍해처럼 갈라져있다. 이 길을 걸어 들어간다 해도, 당신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바다를 건넜던 모세의 추종자들처럼 당당히 지상으로 나오진 못한다. 오히려 갈라진 바다를 통해 당신은 지하로 들어가게 된다. 수면 너머로의 ‘몰입(沒入)’이다. 당신이 바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좁은 길을 걸어가기 전, 처음 마주한 어두컴컴한 방으로부터 깨달을 수 있다.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은 방에는 어떠한 감각도 없고 무엇보다도 볼 것이 없다. 이 어두움을 똑똑히 기억하라. 발에서 시야와, 동시에 중력을 앗아가는 이 검은 영역을.
바다의 끝에서 은은한 빛과 소리들을 감지한다. 어두운 공간에서 감각을 정상화하는 자극들 을 향해 허우적거리게 된다. 비틀거리다 보면 갑자기 강렬한 빛이 당신을 습격한다. 혼수에서 깬 것처럼, 급작스레 되돌아온 감각들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시선을 돌리면 스테인드글라스 를 연상시키는 구조물들과 마주친다. 하지만 구조물의 유리엔 어떤 형상도 없어 그것은 이내 당신의 주의 밖으로 밀려난다. 언제나 당신이 봐야할 것은 빛이 투사되는 면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이는, 당신의 주의를 끄는 것은 빛으로 밝혀진 색면 너머다. 여기에 당신은 ‘들어가 있다’. 당신은 가시적인 공간에 다시 들어옴으로써, 중력이 되돌아왔다는 점에 안도 한다. 지상의 감각이다. 사물과 공간을 구별하고 ‘나’라는 존재를 재확인할 수 있는 힘을 잠시나마 되찾은 것이다. 잊고 있었던 빛이 주의를 끈다. 빛은 아주 익숙한 사물로부터 익숙한 형태로 연장되어있다. 하지만 빛의 원천인 사물은 아주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놓여있다. 그렇다, 두 모니터가 접붙다시피 놓여 있다. 모니터들 사이의 틈을 비집어 보고 싶다. 원래 화면은 당신과/에게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딱히 보려는 의지가 없더라도, 몸을 뒤틀어 두 모니터가 차지하고 있는 비좁은 문을 지나려면, 강제된 시선으로 인해 화면들 사이를 -원래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들어가- 보고 싶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도 뚜렷하게 볼 수 없다.
빼앗긴 당신의 힘을 우리에게로 옮겨와, 볼 수 없는 것을 보겠다. 첫번째로 놓인 모니터의 화면에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1971)의 ‘루도비코 실험 씬1)’이 보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씬은 마치 만화경처럼 가변되어, 반사된 이미지가 세면으로 접붙어 펼쳐진 칼레이도사이클2) 형태로 가변되어 있다. 세 접면에는 영화 주인공인 알렉스의 고정된 신체와 눈알이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중앙에는 일종의 소실점과 같이, 이미지가 텅 비어버린 구멍이 뚫려있다. 검은 구멍에서는 눈알을 고정시키는 강압적인 손가락들이 이따금 날름거린다. 가변된 영상 속에서 알렉스의 시선들은 각각 스크린의 지평 너머와 영상 의 중앙, 그리고 스크린의 주변부를 바라본다. 이 시선들은, 당신의 시선처럼, 무화된다. 화면 너머(만화경의 네번째 접면)에는 원래 있어야할 관람자-세계가 부재한다. 눈알의 방향이 겹치게 되는 중앙부에는 검은 블랙홀만이 존재한다. 알렉스는 화면의 가장자리들도 볼 수 없는데, 이는 16:9비의 모니터 화면 속에 5:3의 비율로 영상이 얹혀 있기 때문이다. 한때 가장 강력한 몰입의 형식이었던 시네마 스크린의 비율은, 더 강한 몰입의 비율을 가지고 태어난 모니터 속에서 되려 영상이 힘을 잃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동시대적’ 화면에서 ‘오래 전의 이미지’들을 보게 될 때 마주하는 레터박스가 알렉스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알렉스는, 영상의 이미지가 검은 테두리를 쓰고 모니터에 얹혀있듯, 일반적인 실험실이 아닌 몰입의 전당-어두운 영화관에 앉혀있다. 누액 세례에 힘입어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실험영상에 몰입한다. 모든 시네마(와 그 후계자들)의 최종 목표가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주의가 집중되어, 영상 안으로 걸어들어가 영상이 되는 것. 하지만 영상이 보는 주체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권력에 영상의 힘이 배가됨으로써 더욱 강력한 주체가 세계를 (이곳과 저 너머를 동시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실험의 최종 목적에 따라 결국 완벽한 몰입은 성사되지 않는다. 알렉스는 실험영상의 폭력적인 힘이 되지 못하고 퉁겨져 나옴으로써 역겨움을 겪는다. 그의 눈은 화면 너머가 아닌 실험영상과 알렉스 자신 사이의 텅 빈 공간, 영화관의 어둠을 바라본다. 역겨움으로 치환된 공간, 여기에서 그는 괴로워하며 호소한다. “I’ve learned me lesson, sir. I see now what i’ve never seen before. I’m cured!”. 잠시나마 몸을 억지로 구겨 몸을 돌렸을 때, 당신이 괴로웠던 이유도 소리나 비좁은 공간 때문이 아니다. 당신 역시 새로운 눈, 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사는 실험을 지속하며 대답한다, “ You’re not cured yet, boy” . 아직은 당신도 그 눈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
당신은 너머에 펼쳐진 세계와 대상들을 향한 익숙한 눈을 되찾고 싶을 것이다. 반대편의 두 번째 모니터로 시선을 옮겨본다. 안을 차지한 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광고들이다. 이미지 만큼이나 철저히 계산적으로 덧입혀진 소리들 덕분에 집중하지 않으려 해도 주의를 빼앗기고 만다. 다시 우리의 특권을 이용하여, 이 영상들을 마주하듯 들어가 보자면, 광고들은 처음 (못)마주했던 영상과는 다르게 아주 ‘정상’적인 방법으로, 즉 16:9의 비율로 화면 안에 안착해 있다(이 덕분에 영상의 가장자리들을 흘끗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 안으로 굳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광고 영상은 당신과 이곳을 향해 튀어나와 있다. 몰입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진짜 내용’으로서, 주의를 빼앗으며 언제 어디에서든 당신을 둘러싸는 것.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는 쉽게 되돌아온다. 광고는 어쩐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두 화면-영상들 사이에는 이상한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하나는 볼 수 없고, 하나는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하나는 들어가 있고 하나는 나와 있다. 그러나 두 화면-영상은 모두 보기와 그에 따른 힘을 박탈(당)한다는 점에서 같다. 보기를 빼앗(고 빼앗)기는 주체는 각기 다르지만, 어떤 강탈의 상황에서도 권력의 시소 운동이 발생한다. 알렉스는 구속복이 입혀져, 어두운 구멍들을 쳐다보며 볼 대상을 박탈당했다. 알렉스가 놓인 영상은, 이미지와 그 조건들 사이의 권력 투쟁에서 힘을 잃은 대상화된 이미지들에게 씌워지는 임시적 구속복, 검은 레터박스를 뒤집어 썼다. 광고는 자신을 보도록 할 대상들을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이의 당신, 당신은 두 화면을 볼 수 없다. 화면에서 연장된 빛과 소리로부터 그것을 대리적으로 볼(수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른다(심지어 빛은 화면과 연동되어 이리저리 변화한다). 하지만 당신의 보기는 예전과 같지 않다. 당신은 보기는 예전과 같이 당신을 주권적인 힘을 갖은 존재로 보장하지 못한다.
어짜피 보지도 못하는, 보이지도 않는 영상들인데 무슨 소리냐고 물을 수 있다. 물론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아무것도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보아야할 ‘객관적인 외관의 지평 너머3)’의 것들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당신이 보아야할 것은 이미 보인다. 화면과 화면 사이의 공간, 빛으로 밝혀져있지만 원래 어둠인 바로 그 공간이다. 당신이 볼 대상 없음의 상황에서 진짜 주의를 기울여야할, 들어 가야할 공간이 ‘눈 앞’에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그것은 낯설다. ‘눈 둘 데가 없다’. 일상에서 종종 당신을 찾아오는 상황과 유사하다. 지하철 에서 휴대폰이 나갔을 때. 사람들을 계속 쳐다볼 수도 없고, 옆 사람의 화면을 훔쳐볼 수도 없을 때. 노선도와 곳곳의 광고를 다 뜯어보고도 여전히 도착지는 몇 정거장이나 남았을 때, 당신은 불안함을 느낀다. 지루함에 의해 유발되는 것처럼 혼동되곤 하는, 이 당혹스러운 감정은 사실 주의를 되찾기 시작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불안과 초조를 잠재우기 위하여 당신이 취하곤 하는 선택지는 어두운 지하철 창문을 내어다보거나 눈을 감는 행위 두 가지일테다.
여기에선 다시 한 번 익숙한 빛의 공간으로 넘어들어가는 것을 택한다. 천들로 가로막힌 비좁은 공간에서 폭신한 의자에 몸을 누인다. 마치 바다의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듯이. 이제 소리와 빛은 순응된 감각과 천에 의해 먹먹하게 느껴진다. 당신이 할 일은 낮아진 몸에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는 것이다. 거기에는 천을 투과해오는 빛이 있다. 영상과 연동된 빛은 영상을 이쪽 으로 더욱 튀어나와보이게 한다. 하지만 움직이는 빛은 자신을 둘러싼 어둠 외에는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당신은 이곳에서도 눈을 감는다. 그리고 잠에 들어야 한다. 고단함의 끝에 맞이하는, 일상을 내려놓는 휴식을 감상적으로 은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때때로 영화관의 웅장한 소리와 어둑한 빛 아래서 가장 깊은 잠에 드는 것을 말한다. 혹은 늦은 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바라보다가 광고가 나올 때에야 비로소 눈을 감고 잠에 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격렬한 저항을 통해 당신은 가장 흔한 ‘악몽’,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게 된다. 위도 아래도 없는 검은 무중력 속으로.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둡다. 잠시 주어졌던 땅을 벗어나기 전, 빛이 다시 당신과 당신의 힘을 빼앗아 가버렸기 때문이다. 비틀거리며, 다시 한 번 홍해를 가로질러 헤엄친다. 여전히 당신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바다를 건너 주권을 되돌려 받았(다고 생각했)던, 하나의 주체가 되었(다고 믿었)던, 유태인들처럼 약속된 땅을 비추는 빛 아래 서지 못한다. 오히려 당신은, 말에 올라 모든 이들을 내려보다가 물살에 휩쓸려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이집트인들이다.
당신은 대상들과 함께 두둥실 떠오른다. 암순응 되지 못한 두 눈을 애써 부릅뜨며 중력을 되찾고자 허우적거린다. 그러나 머리 뒤로는 묘골을 송연하게 하는 비명과 더불어, 알렉스에게 역겨움을 선사했던, 중력을 잃은 당신에게도 어지러움을 가중시킬 환희에 찬 합창 교향곡이 들려온다.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도다 ... 백만인이여, 서로 포옹하라! ”
마지막으로 당신은 어두운 방을 본다. 익숙한 비율로 뚫린 창문을 통해 우리가 보아야할, 들어가야할 바로 그 공간을 본다. 당신과 알렉스, 광고와 모니터의 빼앗긴 권력들이 이 공간에 응축되어 나란히 떠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다에 휩쓸린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을 싣고온 말의 눈과 바다의 주인인 물고기들의 눈을 드디어 제 눈 앞에서 보았듯이, 어지러운 어둠 속에서 당신도 힘의 찰나적 수평을 잠시나마 엿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고개만 돌리면 어두운 물을 투과해 번뜩이는 실낯 같은 복권(復權)의 빛이 있다. 빛은 당신이 서있을 땅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펼쳐진 바다의 저 끝에 빛이 보인다한들 당신은 마지막까지 헤엄칠 수 있겠는가?
불량선인~갈유라
1)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주인공 알렉스는 다양한 강력 범죄를 저질러 온 끝에 투옥된다. 14년의 형기를 살던 중, 2주간의 집중교화프로그램을 통해 치료되면 석방된다는 회유에 알렉스는 ‘루도비코 요법’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이 ‘루도비코 치료법’이란 일종의 혐오 요법으로, 피험자는 약물을 투여받으며, 폭력적인 영상
(구타, 강간, 살인, 전체주의적 추종, 전쟁)의 이미지를 강제적으로 시청한다.
2) 만화경을 뜻하는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라는 이름은 그 내부에서 칼레이도사이클(Kaleidocycle) 을 형성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칼레이도사이클은 만화경 내부의 네 접면에 이미지가 무한하게 반사-변형되는 기하학적 형상-효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아름다운(kalos) 형상(eidos)”을 뜻한다.
3) “원격-객관성과 더불어 우리의 눈은 단순히 음극 스크린에 의해 닫힌 것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주위, 우리 눈앞에 있는 것조차도 응시하거나 바라보려 하지 않고 오직 객관적 외관의 지평 너머에 있는 것만을 주시하고 보려한다” // 폴 비릴리오, 이정하역,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열화당, 2008), p.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