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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how 2020.03.14-03.29 (Jungganjijeom),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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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2-22.01.28 Incheon Art Platform, Incheon, Korea

18.01.08-18.03.09 Baltic Centre for Contemporary Art, Newcastle upon Tyne,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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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JACOB'S LADDER Solo Exhibition Review', Public Art 2018.09 Vol.144

2016 'Capitalism-Neo liberalism and Dilemma of Art', Monthly Art 2016.04 vol.375

2014 'In my bag'project, Rubybox Publisher Co

2012 Contemporary Art Journal Vol.9


Back to Back : What if? 'REVIEW'


반 정도 잊어버린 꿈 속에서 계속 돌아가는 회전문처럼



콘노 유키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연상이 펼쳐질까.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첫 번째 꼬리를 가진 주체 혹은 대상은 다른 주체/대상을 물게 즉 관계를 맺게 된다. 하나가 곧 하나의 꼬리를 무는 (동어)반복과 달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우 둘 이상의 대상/주체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주장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바로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우리는 단순한 반복과 예측할 수 없는 비약의 가능성을 둘 다 포함한다. 같은 일의 반복일 수도 있고, 반복이 곧 다른 효과를 창출하는 기점이 되면서 (반복이라는) 상태의 묘사와 사건의 발생을 모두 내포한 힘을 꼬리에 꼬리 물기가 보유하고 있다. 적절한 예시로 교통 사고가 있다. 작은 규모로 발생한 추돌 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더 무는 경우, 화재와 같은 다른 사고를 부르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자동차에 어떤 자동차가 부딪힌 결과 자체는 반복적이다. 그런데 거기서 퍼져 나가는 영향은 두 대상/주체를 (두 운전자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인과관계로 단단히 묶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기란 반복된 결과와 어떤 사건과 사태를 유발하고 둘 이상의 대상/주체를 인과관계로 묶는다. 이 두 가지 속성을 우리는 각각 ‘연속(하는 결과)’과 ‘연쇄(에 의한 효과 발생)’로 보자. 두 속성은 각기 다른 효력을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두 대상/주체 이상의 ‘만남’에 있다. 만남은 우연히 생기거나 필연적으로 생길 수 있지만, 이를 판단하는 근거는 창출의 기점, 바로 효과 발생에 의해 제시된다. 교통사고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다리가 봉쇄되고 사람들이 대피한 다음에 마을에 불씨가 옮겨 붙으면, 추돌 사고가 전체 연결고리의 기점 즉 원인이 된다. 이때 연속의 속성은 이미 연쇄로, 말하자면 서로 다른 개별 요소들이 원인과 결과로 묶이는 관계로 전개된다. 이처럼 상태 묘사와 돌발 상황을 창출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기는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반복도 아니고 의도된 책략도 아니다. 오히려 우연히 벌어진 일에서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각각에 분배할 수 없는) 잠재력의 온/오프 상태이다. 이 상태는 도로를 통제해봤자 의미가 없는, 그 정도로 예기치 못하고 순식간에 닥치는 힘이다. 

이런 통제는 기획전에서 작품의 위치, 바로 공간적인 위치와 독해의 위치를 각각 전시 공간과 주제에 종속시킬 때 작동한다.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는 이렇고, 어디에 어떤 작품이 들어가고, 어떤 장비가 필요하고 어떤 안내문과 설명을 붙이고 등등. 이런 준비 과정이 대변해주듯이 미술 전시는 통제가 작동하며 어떤 변수가 발생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설령 제작의 스케치 업부터 실제 공간에 ‘계획’이 관여한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잠재력은 완벽하게 조정되고 통제되지 못한다. 지정된 작품의 위치와 전시 주제는 대부분의 경우 작품을 통제하고 우발적인 상황을 억제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상을 통해서 작품에 내재된 잠재력을 끄집어낼 수 있다. 잠재력을 끌어내는 행위는 외부 요인을 전시 주제나 전시장에 가져오는 것과 별개로 이루어진다. 관객―불청객일지도 모르는―의 소란이나 전시 기간의 조기 종료, 그리고 그외 (외부) 가능성들은 잠재력을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때 잠재력이 외부에서 주어진다면 작품과 작품이, 작품과 관람자가 맺는 연속과 연쇄의 관계 설정 자체가 무효해진다. 전시를 컨트롤하는 주체의 상상과 대비를 초월할 정도로 어떤 일이 급습하는 것과 달리 보는 행위, 즉 감상을 경유해서 우리는 작품에 잠재하는 힘을 끄집어낼 수 있다. 

이번에 중간지점에서 열린 «제1회 꼬리에 꼬리를 물고: what if?»는 작가 세 명이 참여한 단체전이다. 말 그대로 꼬리를 꼬리를 무는 방식, 더 익숙한 사례를 들면 (서문에 나오듯) SNS 상의 릴레이 챌린지처럼 기획된 이번 전시는, 준비 기간 중에 세 명이 각각 어쩔 수 없이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필자 역시 직접 전시를 관람하지 못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번 전시 제목은 이런 외부적 요인 때문에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서로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간 운영자와 작가는 미팅을 했고, 작가 중의 한 명은 설치를 직접 못했다. 뿐만 아니라 리뷰를 쓰는 사람이 전시를 직접 보러 가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번 전시 제목을 거대한 외부 요인에 바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은 주제에서 뻗어나가는 국가 사회적 분위기로 확장되기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서 봤듯이 작품과 관람객이 만나 그들이 끄집어내는 잠재력의 차원, 말하자면 더 작은 규모에서 우연히 발생하고 창출되는 힘이다. 세 작가는 한 공간 안에 설치와 영상, 그리고 사운드를 어우러지게 보여준다. 임정수 작가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작품 <피부 여러개>(2019)와 관련되는 동명의 설치 작품을 선보이고, 갈유라 작가는 영상 설치 작품 <사용자 모니터 환경에 따라 색상이 달라 보일 수 있습니다>(2020)을, 정상인 작가는 사운드 작업 <1382400>(2020)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의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복은 작가의 섭외 방식뿐만 아니라 전시 공간에서 전개되는 작품의 색감에 나타난다. 의도했건 안 했건 색상이 맞는 작품끼리 어울린 결과만 보면, 꼬리에 꼬리를―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지만―“잘 물었다”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전시 공간에서 참여 작가 세 명이 다 같이 준비를 함께 못 했는데도, 나아가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지목하는데도 결과적으로 세 작가의 작품은 공간 안에서 잘 맞아떨어졌다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꼬리에 꼬리를 물기는 단순히 전시의 기획성으로 포섭되고 말 것인가? 공간 내부에 실현된 결과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과 달리, 리뷰에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작품이’ 어떤 힘을 펼치는지이다. SNS 상의 챌린지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고 반복에 그칠 수도 있지만, 그 ‘전개’에 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선보이는 작품은 가만히 놓이기만 하지 않는다. 준비 기간에 몇명 작가가 부재하고 코로나바이러스가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전시가 다행히 이루었다는 궁극적인 결과에 머물지 않는다. 기획 의도와 외부 요인은 전시를 전부 다 포섭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번 전시가 감상자의 관람 행위를 통해서 꼬리를 무는 결과도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작품은 외부에서 주어진 제약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전시장을 나오면 정상인 작가의 사운드를 들을 수 없고, 임정수 작가의 설치 작품을 비메오를 통해 영상에 나오는 무대장치 혹은 퍼포머의 도구로 보게 되고, 갈유라 작가의 작품을 사진과 같은 정지된 기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반대로, 그러니까 전시장에서 하는 경험에 이미 작품에 다가가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전시를 여는 기간/시간은 물론, 오늘날 관람자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제약이 작품 감상에 영향을 미친다. 정상인 작가의 작품의 경우 전체 연주 기간 동안 전시장에 머무는 관객은 없었을 것이고, 갈유라 작가의 모니터에서 나뭇잎, 그림자, 바다, 하늘의 이미지가 움직이지 않(다고 판단하)자 관객은 금방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임정수 작가의 작품 역시 펼쳐진 공간에 퍼포먼스로 개입을 하는 작가가 전시 공간에 없었다면 설치 작품은 퍼포먼스의 도구나 무대로, 영상 작품은 퍼포먼스의 기록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작품은 길이 때문에, 어떤 작품은 멈춘 화면 '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작품은 작품에서 파생되거나 종속되는 대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우리는 전시 공간에서도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지 못한다. 전시 주제가, 전시장의 배치가, 그리고 전시와 관련 없는 외부적 요인이 미치는 것과 다른 지점에서, 이들은 제약이 들어간 감상을 상정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이 궁극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효과, 말하자면 연속과 연쇄를 통해 전개하는 힘인 잠재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작품은 이런 제약 때문에 자체적인 잠재력을 끄집어낼 수 있다. 세 작가의 작품은 잠재력을 실현하는 중인 상태로 전시장에 배치된다. 바로 이미 전시 자체가 우발적인 결과물이고 관람객은 우발의 장면으로 잠재력의 ‘흔적’을 보게 된다. 정상인 작가의 경우,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계속 틀어지는 사운드는 관람객이 입장할 때 부분으로만 경험하는 대상이다. 한편 갈유라 작가의 경우는 모니터와 사운드의 경험을 상영시간이나 러닝타임과 다른, 마치 인스타그램을 켜자마자 우연히 보는 첫 포스팅처럼 전달한다. 그리고 임정수 작가의 작품은 퍼포먼스에 들어갈 어떤 요소로, 그리고 퍼포먼스의 어떤 흔적으로 전시되면서, 퍼포먼스를 보는 경험을 파편화한다. 각각이 전체 중의 부분들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작품 자체로 잠재력이 뿜어져 나오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그러기에 관람객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복의 상태가 아니라 이미 발생되는 효과를 목격한다는 의미에서 관람자가 된다. 이번 전시에서 잠재력이란 보기의 방식을 통해서 끄집는 것이 아니라, 전시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이미 발현 중인 결과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의 <가구의 음악>(1920)처럼 감상하는 자세에 걸리지 않는, 작품의 파편적인 존재 방식과도 같다. 사티가―결국 실패했지만―의도한 이 작품은 쉬는 시간에 연주되는 음악이었고 사람들의 몰입을 거부하는 음악으로 작곡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진으로 기록하고 비메오로 작품을 대신 보는 환경에서, 다시 몰입시키려는 태도와 달리, 작품의 잠재력은 작품 자체로 파편화하면서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임정수 작가의 <피부 여러개>라는 제목은 퍼포먼스의 존재 방식뿐만 아니라 감상 방식, 그리고 세 작가가 전시 공간에서 제시한 작품의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 우리는 작품 자체를 이제 본다기보다는 작품의 어떤 부분을 통해서 작품을 본다. 본체가 아닌 여러 개의 피부를 우연히 접하고 떠나는 감상 방식은 어떤 힘이 발현되는 결과, 말하자면 흔적으로 존재한다. 흔적이란 어떤 존재나 사건을 지표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번 전시의 경우 작품의 일부분으로 작품이 스스로 토막 낸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품은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과 달리, 연속과 연쇄의 결과는 작품으로 하여금 본체와 이어지면서 힘을 발휘한다. 감상을 다 못하는 전체 사운드 트랙과 영상에 파악할 수 없는 러닝타임과 스틸 이미지에 가까운 시각적 결과물, 그리고 작가가 오지 못하는 환경에서 선보여진 퍼포먼스는 여러 개의 피부로 쪼개져 전시장에 있다. 작품이 자체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때, 반 정도 잊어버린 꿈 속에서 회전문이 계속 돌아가는 것처럼 쪼개진 작품은 잠재력의 발현을 그들 스스로 조건 짓는다. 관람자의 (몰입이 아닌) 파편화된 감상방식에, 작품은 다가갈 수 없는 여지를 스스로 만들어 반복과 연쇄를 자체적으로 작동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