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어두워져(Getting Dark)>_Single Channel Video(00:05:39)_2018
‘오토’와 ‘디아’의 물리학
김홍기 비평가
#1.
섬광. 그리고 암전. 스포트라이트가 어떤 실내의 부분을 비춘다. 책상 위에는 종이가 없는 타자기, 스탠드, 탁상시계, 책들, 빈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다. 그 앞에는 의자가 있다. 빈 새장과 라디오도 보인다. 한 남자가 등장한다. 복면으로 얼굴을 싸매고 평범한 셔츠와 바지 차림이다. 책상에 앉아 종이 없는 타자기로 무언가를 타이핑한다(또는 타이핑하는 시늉을 한다). 그러다가 빈 찻주전자로 찻잔에 무언가를 따라 마신다(또는 마시는 시늉을 한다). 다시 타이핑을 하다가(또는 그런 시늉을 하다가) 책 한 권을 들고 뒤적거린다. 그리고 암전.
갈유라는 올해 8월에 <오토스포라1: 야곱의 사다리>라는 이름의 개인전을 열었다. ‘오토스포라(autospora)’라는 작가의 신조어가 궁금증을 자아냈다. 작가는 말했다. ‘디아스포라(diaspora)’에서 ‘디아(dia-)’를 ‘오토(auto-)’로 대체한 거라고. 그러니까 ‘분리/횡단(dia-)’을 ‘자기/자가(auto-)’로 바꾼 것이다. 밖보다 앞선 안으로, 객관보다 앞선 주관으로, 공동체보다 앞선 자아로 관점의 방향을 틀어 보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그 이전에는 작가의 관심이 바깥을 향해, 미지의 객관성을 향해, 다른 공동체를 향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넓은 의미의 디아스포라를 실천했던 셈이다. 이런 외향적인 작업은 대략 2014-15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그는 청주나 부산처럼 낯선 지역에서 마주친 낯선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의 작업을 종종 해왔다. 더 이상 가동되지 않는 청주의 담뱃공장과 연초제조창, 부산 다대포 부근의 퇴락한 어촌들을 돌아다니면서 사라져 가는 지역사회의 생활양식을 발굴해내는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둘째, 동식물을 실제로 키워 나가는 과정을 기록한 작업들이 있었다. 작가는 마트에서 파는 유정란을 실제로 부화시켜 병아리를 닭으로 키워냈고, 싹이 나서 상품가치가 없어진 마늘이나 식당에서 식재료를 다듬으며 잘라낸 파뿌리를 가져와 심어서 잠재적인 생명력을 증명해냈다. 이 두 종류의 작업들은 모두 꽤나 장기적인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첫째 부류의 작업들은 해당 지역의 공동체와 일정한 유대감을 형성해야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고, 둘째 부류의 작업들은 생명체를 키워내는 데 요구되는 일정한 정성과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갈유라는 그 과정을 묵묵하고 성실하게 수행해냈다. 그런데 그는 왜 문득 작업의 방향을 ‘오토’로 튼 것일까?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그 이전에는 작가의 관심이 바깥을 향해, 미지의 객관성을 향해, 다른 공동체를 향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넓은 의미의 디아스포라를 실천했던 셈이다. 이런 외향적인 작업은 대략 2014-15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그는 청주나 부산처럼 낯선 지역에서 마주친 낯선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의 작업을 종종 해왔다. 더 이상 가동되지 않는 청주의 담뱃공장과 연초제조창, 부산 다대포 부근의 퇴락한 어촌들을 돌아다니면서 사라져 가는 지역사회의 생활양식을 발굴해내는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둘째, 동식물을 실제로 키워 나가는 과정을 기록한 작업들이 있었다. 작가는 마트에서 파는 유정란을 실제로 부화시켜 병아리를 닭으로 키워냈고, 싹이 나서 상품가치가 없어진 마늘이나 식당에서 식재료를 다듬으며 잘라낸 파뿌리를 가져와 심어서 잠재적인 생명력을 증명해냈다. 이 두 종류의 작업들은 모두 꽤나 장기적인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첫째 부류의 작업들은 해당 지역의 공동체와 일정한 유대감을 형성해야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고, 둘째 부류의 작업들은 생명체를 키워내는 데 요구되는 일정한 정성과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갈유라는 그 과정을 묵묵하고 성실하게 수행해냈다. 그런데 그는 왜 문득 작업의 방향을 ‘오토’로 튼 것일까?
#2.
섬광. 그리고 암전. 스포트라이트가 어떤 실내의 부분을 비춘다. 책상, 의자, 타자기, 새장 등의 집기류는 자취를 감추고 제각각 높이가 다른 수직적인 오브제들이 그것들을 대신해 늘어서 있다. 복면으로 얼굴을 싸매고 평범한 셔츠와 바지 차림의 한 남자가 있다. 보이지 않는 타자기로 타이핑을 하고, 보이지 않는 찻주전자로 찻잔에 무언가를 따라 마시고, 보이지 않는 책을 집어 뒤적거리고, 다시 보이지 않는 타자기로 타이핑에 열중한다. 그리고 암전.
잠시 모르는 척 눙치고 있었던 단어를 끄집어내야겠다. 그것은 ‘디아’든 ‘오토’든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꼿꼿이 남아 있는 ‘스포라(spora)’이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씨뿌리기’를 뜻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갈유라는 실제로 씨를 뿌렸다. 싹이 터서 시장에서 폐기될 운명의 마늘을 가져다 심어서 어엿한 풀로 만들었고, 식당에서 줄기만 남기고 잘라내어 폐기될 처지의 파뿌리를 가져다 심어서 줄기가 솟아나게 했다. 씨뿌리기를 동식물을 망라한 번식의 행위로 받아들인다면 식용으로 마트에 출시된 유정란을 150일에 걸쳐 멀쩡한 닭으로 키워낸 것도 언급할 만하다. 이 작업들의 공통점은 경제적 논리에 의해 폐기를 선고받았거나 기껏해야 제한된 용도(이를테면 식용)만 허용된 대상들에 잠재된 생명력을 가시화했다는 것이다. 씨뿌리기를 보다 넓은 차원의 환유로 받아들인다면 갈유라가 주목했던 담뱃공장이나 연초제조창, 포구의 촌락들 역시 국가 경제구조의 체질 변화로 용도 폐기의 운명에 처한 장소들인 것이고, 작가의 작업은 그곳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한 생명력을 ‘발아’시키려는 노력으로 읽힐 수 있다. 즉 갈유라의 작업들은 불모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간직한 에너지를 길어 올리기 위해 씨를 뿌리는 ‘스포라’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갈유라의 작업에서 에너지의 흐름이 중요해진다. 정체된 에너지가 운동성을 얻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흐름이 만들어지고 어떤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그의 <지상의 양식>(2015)을 보면 작가는 부산의 포구 촌락의 집집마다 방치된 도구나 서적 같은 근현대사적 ‘유물’을 발견해내고 화폐개혁 이전의 옛 화폐를 소환하여 그것의 교환을 시도했다. 이처럼 그의 작업에서는 다시 소환된 과거의 ‘유물’을 교환하는 수단으로 그 역시 폐기되었던 과거의 화폐가 활성화됐다. 인간 사회의 대표적인 가치의 교환수단이 화폐라면 의미의 대표적인 교환수단은 언어일 것이다. 언젠가 갈유라가 사라진 언어의 잔류하는 에너지를 다시 싹 틔우는 작업을 시도하더라도 그건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3.
섬광. 그리고 암전. 스포트라이트가 어떤 실내의 부분을 비춘다. 이제 집기류를 대체한 오브제들도 종적을 감춘다. 복면으로 얼굴을 싸매고 평범한 셔츠와 바지 차림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이제 스스로 타자기가 되어 타이핑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고, 스스로 찻주전자와 찻잔이 되어 음용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고, 스스로 책이 되어 펼치고 펼쳐지며 독해의 주체이자 대상이 된다. 요컨대 온전한 물질 되기의 마임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암전.
그런데 에너지의 교환은 대체로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의미를 교환하는 언어의 사용은 소통과 불통의 상호 간섭으로 의도치 않은 잡음을 수반하기 일쑤다. 갈유라의 작업의 방향이 밖(dia-)에서 안(auto-)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여기에 있다. 타자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절감하게 되는 근본적인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반쯤의 이해에 언제나 뒤따르는 반쯤의 오해, 반쯤의 합일에 언제나 뒤따르는 반쯤의 결렬, 반쯤의 성공에 언제나 뒤따르는 반쯤의 실패, 자아와 타자의 동기화(synchronization)는 늘 (오)작동하는 것이다. 동시대인들은 모순되게도 제각각 다른 시간대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갈유라의 <디지털 레이싱>(2017)은 이런 한계를 형식 실험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는 발길이 닿는 대로 임의의 지역을 달리면서 지나치게 되는 타인에게 “지금 몇 시입니까?”라는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매번 다르게 되돌아오는 타인의 응답은 각자의 주파수가 얼마나 제각각인지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갈유라의 오토스포라는 한 공동체 안에서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유통시키기 이전에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놓인 매체 형식 자체의 근본적인 (오)작동을 탐구하는 시도이다.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매체, 이편과 저편 사이의 사다리의 불완전성은 <오토스포라1: 야곱의 사다리>에서 말차라는 매체를 통해서 표현된다. 인도의 거리를 거닐며 행인들에게 말차를 한 잔씩 권하는 제이콥에게 각 행인은 천차만별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4.
섬광. 그리고 암전. 섬광. 그리고 암전.
갈유라의 오토스포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과 사물을 포괄하는 물질적인 에너지 그 자체의 교환 형식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울음소리가 급하고 반듯이 잔다>는 물질의 활성화된 에너지와 그 교환의 형상을 설치작업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날이 어두어져>는 비가시적인 암전의 찰나에 일어나는 인간과 사물 간의 에너지 교환의 여러 스펙트럼을 예시한다. 인간과 사물의 뚜렷하게 분리된 일상적 차원에서부터 인간과 사물이 서로의 에너지를 교환하며 인간 되기와 사물 되기로 이어져 결국 지각 불가능한 암전의 차원으로 분산하기까지 여러 층위의 가능성이 펼쳐진다. 같은 시퀀스가 에너지 교환의 다양한 정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다. 이렇듯 갈유라의 오토스포라는 근본적인 물질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에너지의 교환을 다룬다. 이제 디아스포라의 내용적 오류의 가능성이 작가를 오토스포라의 근본적 형식의 탐구로까지 전환시킨 것이라면, 이제 다시금 그 형식은 내용의 살과 뼈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오토’와 ‘디아’가 길항하는 그 ‘사이’에서 형식은 내용과 불안정하게나마 적절한 균형을 찾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져(Getting Dark)>_정글짐(Jumgle Gym)_전시전경_2019
사진출처 @Art Space Pool
